사설 나라를 지켜온 사람들을 위한 보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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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은 의병의 날이다. 그리고 올해 6월 10일 6.10 만세운동 10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은 20여 일 만에 한양을 함락했다. 선조는 백성을 버리고 평양성을 거쳐 신의주까지 피난을 갔으며, 적군을 막아야 하는 관군은 도망치기 바빴다. 그러한 가운데 홍의장군이라 불렸던 경상도의 곽재우의병장을 시작으로 각지에서 의병들이 일어나 왜군들을 물리쳤다. 그는 현풍 유생으로서 경상도 의령에서 1592년 4월 22일 10여 명의 가동(家童)을 이끌고 의병을 일으켰다. 붉은 비단옷과 백마를 타고 스스로를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 : 붉은 옷을 입은 하늘이 내린 장군)’이라 부르면서 기세를 올렸다. 곽재우와 더불어 경상우도에서 활약이 컸던 인물로 김면과 정인홍, 호남에서는, 김천일과 고경명 등이, 경기도에서는 홍계남과 우성전 등을 대표로 꼽을 수 있다. 함경도 지방에서 정문부가 의병을 처음 일으킨 것은 1592년 7월이다.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의총리에 있는 금산 칠백의총은 조선 임진왜란 때 왜군과 싸우다가 순절한 700의사의 무덤으로, 1592년에 조헌의 의병과 영규의 승병이 합군하여 청주성을 수복하고, 700인의 의병을 이끌고 금산으로 진격, 왜군과 혈전을 벌여 전원이 순절한 것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의병 이외에 승려들로 조직된 의승군(義僧軍)도 있었다. 승려로서 최초로 봉기한 이는 영규(靈圭)이다. 의승군이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된 것은 1592년 7월 이후였다.
전쟁 초기 선조는 자기의 자산을 가지고 왜군과 싸운 의병들에게 군량미를 지원했으나, 전쟁의 승기를 잡은 후에는 의병들을 관군화 하거나 해체했다. 그 이유는 군량미를 지원하는 것이 아깝고, 의병들이 사병화(私兵化)되어 역도가 될까 두려워서이다.
전쟁 후 선조는, 호송공신 86명, 선무공신 18명, 청난공신 5명으로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보다는 자신을 돌본 사람들을 우선했다. 이러한 이유로 정유재란이나 병자호란에서는 의병들의 활약을 보기 어렵게 되었다.
누가 국가를 위해 희생하겠다고 하겠는가?
국가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에게 국가는 최대한의 예우와 보상을 해야 국가가 튼튼하게 유지될 수 있다. 미국이 다문화 다인종이면서 세계의 제1 국가로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나라를 위해 희생한 유공자에게 최대한의 예우를 하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모습을 영화 ‘라이언일병구하기’에서 볼 수 있다. 지난 4월 미국의 F-15E 스트라이크 이글 전투기가 이란 상공에서 격추되고 조종사가 인질로 잡힐 위기에 처하자 특수부대와 수십 대의 항공기, 헬리콥터, 드론 등을 총동원해 긴박한 구조 작전을 펼쳤다. 지난 6월 6일 6·25 전쟁 당시 국군 전사자 유해 10구가 70여 년 만에 하와이에서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고, 미군 전사자 유해 3구는 미국으로 봉송됐다.
대한민국은 참전용사에게 매달 49만 원, 고엽제 환자들에게는 고도 60만 원, 중등 44만 원, 경도 29만 원을 주고 있다. 기초생활도 어려운 금액이다.
6월은 호국 보훈의 달이다. 나라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할 때 대한민국의 미래가 밝다. 안타까운 것은, 일부 몰지각한 정치인들에 의해 젊은 세대의 호국. 보훈의 의미가 퇴색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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